단조에서 장조로
최고관리자2023-10-04 04:04

“헤일리는 좀 어때?”

“열도 많이 떨어졌고, 기침도 잦아들었어. 문제가 있다면 눈을 마주치려고 하질 않는단 거?”

“네게도 그런단 말이지… 알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일라이저는 가느다란 눈썹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그라나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가 심장을 찢어발기는 것만 같았다. 십여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야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믿었는데 아무래도 저만의 달콤한 착각이었던가 라고 그라나트는 생각했다.

일곱 살의 그라나트는 손을 갖다대면 얇은 얼음처럼 깨져버릴 것 같은 소년, 헤일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스승님의 손을 꼭 쥔 채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겨울하늘처럼 시린 푸른색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심장에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첫눈에 반했다는 뻔하고 멋 없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차가운 비에 젖은 따듯한 입술과 맞닿았을 때의 설렘과 환희는 오로지 그만의 것이라 얘기하려는 듯, 빗물보다 더 차가운 바다에 미련 없이 몸을 내던졌던 헤일리는 지독한 독감에서 회복한 이래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섞지도 않았다. 십이년을 함께 해온 형제들을 모두 저버리고 떠날 만큼 싫었느냐고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질 않아 물을 수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그래’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라나트는 처음으로 품에 가득 끌어안았을 때 기뻐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어놓은 선을 침범한 것에 화가 났다면 진작 싸늘한 시선을 매다꽂았을 헤일리가 어떤 반응도 않고 그저 침묵과 회피만을 하고 있으니 그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가득 차있을지 두려워졌다. 그렇다고 놓아달랄 때 놓아줄 수 있겠느냐면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불가능했다. 그는 헤일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 미움을 받더라도 평생 그 곁에 있겠다고 그날 밤 다짐한 것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라나트는 헤일리를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불에 삼켜져 재가 되고 말지 타오르는 연정을 꺼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애먼 방문만 뚫어져라 쳐다볼 새에 들어가서 말이라도 한 번 더 붙여보는 게 어때?”

“내가 들어가면 헤일리가 싫어할텐데…”

“미리 단정짓지 말고! 혼자 들어가기 무서우면 이 누나가 손 꼭 잡고 옆에 있어줄게. 어때?”

그라나트는 문과 비어트리스를 번갈아쳐다보다 이내 내민 손을 잡고 그의 뒤에 섰다. 비어트리스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동의를 구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자 비어트리스는 냅다 문을 열여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몸은 좀 어때? 약은 잘 먹고 있는 거지? 이 바보가 멍청하게 문이랑 눈싸움을 하고 있길래 데려왔어.”

“…그래.”

기운이라고는 없는 목소리였지만 한숨과도 비슷한 대답엔 약한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비어트리스도 그라나트도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선 병색이 가시지 않은 헤일리를 쳐다봤다.

“비시, 목이 말라서 그런데 물 좀 떠다줄 수 있을까?”

“어? 어어 그래. 잠시만 기다려. …얘도 데려갈까?”

비어트리스가 그라나트의 어깨를 덥썩 잡으며 물었다. 둘 사이에 소리 없는 대화가 오간 것도 잠시, 헤일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란은 괜찮아. 얼음물로 부탁할게.”

“헤일리! 너 아직 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그러자 비어트리스의 주먹이 바로 눈치 없는 형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억울하게 맞은 쪽이 항의하며 쳐다보았지만 때린 쪽은 되려 눈을 부라리며 턱짓을 했다. 얌전히 있으란 얘기였다.

비어트리스가 방 밖으로 나가고서 그라나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야윈 뺨과 피로가 짙은 눈, 마르고 부르튼 입술과 두 손이 바늘처럼 가슴을 쿡쿡 찔렀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연못 속 붕어마냥 뻐끔거리는데 파란 눈동자가 먼저 시선을 맞추었다.

“…너, 만족해?”

“만족하냐니 뭘 말이야?”

“그날 나랑 자고 나서 만족했냐고.”

그제야 비어트리스를 내보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라나트는 차가운 추궁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침묵했다.

“하룻밤으론 마음에 차지 않아서 데려왔어?”

“아니야 헤일리!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내버려뒀어야지.뒤쫓아와서 건져내지 말고 다른 상대들처럼 흘려보냈어야지. 문 밖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 가지고 놀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하나, 내가 왜 귀찮게 주워왔을까, 하룻밤 노리개 주제에 유난이다, 이런 생각?”

한기가 느껴졌다. 벽난로의 장작에서 불길이 줄어들고 잔에 담긴 물이 쩡 하고 얼어붙는 소리를 냈다. 그렇잖아도 수척한 얼굴에서 빠르게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걸 아슬아슬하게 붙잡고서 끌어안았다. 그라나트는 헤일리를 품에 기대게 한 뒤 다시 불을 지폈다. 꺼지기 일보직전까지 내몰렸던 불꽃은 다시 맹렬하게 타올랐다.

“지팡이도 없이 힘을 쓰니까 몸이 못 버티잖아… 다 낫지도 않고서…”

“너…너어…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무슨 생각했냐고? 어떻게 해야 네가 말 한마디라도 할까, 우리랑 눈을 마주치며 얘기를 할까, 내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한 게 잘못인걸까… 그렇다면 나한테만 화를 냈음 좋겠다고… 내내 그런 생각만 했어.”

그라나트는 강마른 어깨를 바짝 끌어안았다. 헤일리의 몸이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는 게 신경쓰였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싫어하면 곧장 놓아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물을 가지러 간 비어트리스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라나트는 누구라도 좋으니 이 어색한 정적을 깨뜨리고 끼어들어주길 바랐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훈기가 한기를 완전히 덮어버리고서야 헤일리가 입을 열었다.

“닷새마다 교제상대가 바뀌는 네가 날 사랑한다고 해봐야 그 순간 뿐이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너 밖에 없었어. 입맞춤도 잠자리도 전부 네가 처음이야.”

“그런 뻔한 거짓말이 내게 먹힐 거 같아?”

“헬모스 산과 크라티스 강에 대고 맹세하는데 한 치 거짓도 없는 진심이야.”

그라나트는 불변의 맹세를 하며 더는 의심을 할 수 없게 쐐기를 박아넣었다. 짧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고 사늘한 바람이 방 안을 어지러이 휘돌았다. 동요하는 헤일리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등을 다독여주자 찬바람은 곧 온기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겐 너 뿐이었는데… 넌 누구랑도 닿는 걸 싫어하니까 다가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어. 그런데… 그 날 네가 키스를 받아주니까… 네가 해도 좋다고 허락해주니까 멈출 수가 없었어. 널 상처주려던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

“내 몸만 원해서, 그저 나와 하룻밤 해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항상 네 곁에 있고 싶어. 너에게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어. 헬렌만큼은 아니어도 네게 사랑받고 싶고, 누구보다도 널 사랑하고, 소중히 하고 싶어. 널 껴안고 싶고 입맞추고 싶고 하루종일 너만 바라보고 싶어. 헤일리… 정말, 진심으로 널 사랑해.”

헤일리의 파란 눈동자가 그라나트의 주황빛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거짓도 없는 것을 읽어내고 나서야 헤일리는 가느다란 두 팔로 옭아매듯 그라나트를 껴안았다.

“내가… 내가 아비도 모르는 부정한 자식이라서, 더러운 피를 타고 나서… 같이 자란 형제마저도 꾀어내는 불결한 것이라서… 차라리 사라져버리자고… 그렇게 생각했어….”

“나에게 넌 세상의 전부인데? 나에게서 너를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야. 스승님도, 다른 녀석들도 너보다 중요할 수는 없어.”

평소같았음 배은망덕의 극치라며 한 마디 쏘아붙였을 헤일리는 얼어있던 눈물샘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을 울더니 급기야 탈진하기에 이르렀다. 그와 함께 빨갛게 열꽃이 피어나자 그라나트는 그대로 헤일리를 들쳐안은 채 문을 열어젖혔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문을 열고 그래! 어, 헤일리는 왜 그래?”

“비시! 일라이저 불러와! 빨리!”

“아알았어! 저기 이거 얼음이니까 좀 얹어주고 있어봐. 바로 데려올게! …일! 헤일리가 열이 나! 어디 았어?”

비어트리스의 외침에 계단 아래에서 일라이저가 재클린과 함께 급하게 뛰어올라왔다. 침대에 헤일리를 눕히고 맥박과 체온을 잰 후 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일라이저는 물수건을 얹어주고 마른 입술을 축여준 뒤 그라나트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전부 방으로 돌려보냈다.

“헤일리랑 얘기 해봤어?”

“뭐어…… 했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럼 됐어. 며칠 더 쉬면 나을테니까 그때까지 옆에 있어줘.”

그라나트는 자리를 뜨려는 일라이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더 해야 하는 건 없어?”

“그야 옆에서 지켜보며 물 달라면 물 주고, 땀도 닦아주고, 옷을 갈아입히거나 새 이불로 갈아주고, 가끔 환기도 시켜주고 해야지. 설마 멀뚱멀뚱 보고만 있으려고 그랬어?”

일라이저의 놀림에 그라나트는 눈을 반쯤 내리뜨고

입매를 뒤틀었다.

“이불 정도는 내가 갈아준다고 하자, 그치만 그란 너

내가 헤일리 옷 갈아입힌다 하면 싫어할 거잖아.”

“싫다기 보단… 그래도 형제끼리고…”

“네가 진짜 괜찮았으면 지금처럼 구구절절 늘어놓지도 않았을 걸? 헤일리도 나보단 네가 더 편할테고 말이야.”

정곡을 찔린 그라나트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자 일라이저는 쿡쿡 웃으며 방을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헤일리의 열은 갑작스레 오른 만큼 빨리 내렸고 물수건으로 식은땀을 닦는 손길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의식이 돌아온 헤일리는 카우치에 구겨져 자고 있는 그라나트를 발견하고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카우치가 불쌍하다 불쌍해.”

카우치의 등받이쿠션이 그라나트를 퍽 안락하게 감싸주고 있는데도 헤일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침대 밖으로 향한 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다 조심스럽게 그라나트의 손끝을 건드렸다. 소심하고 미약한 동작으론 끄떡도 하지 않자 헤일리는 손을 거두고 잠시 머뭇대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잠든 이의 어깨로 팔을 뻗었다.

“그란… 일어나 봐, 그란.”

“음…?”

감겼던 눈이 느릿하게 뜨이더니 곧 퍼뜩  뜨였다.

“헤일리? 무슨  일이야? 어디 불편해?”

“……조금, 추워서 …라고.”

“어, 추워서 뭐? 담요 더 갖다줄까?”

“아니 담요 말고… 그게… 좀… 안아달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새벽녘의 고요함 덕에 끝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잠에서 막 깬 탓에 이해하기까진 다소의 시간이 걸렸다.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너 방금 춥다고 한 거 맞아? 정말 추워?”

“그럼 내가  가짜로 그러겠… 어, 어…?”

갓난 헬렌과 함께 한기가 피어오르는 길바닥에서 지낼 때도, 얼어붙은 바닷바람을  맞아도, 시린 물 속에 잠길 때도 추위라곤 느껴본 적 없던 헤일리는 생전 처음 몸을 떨고 있었다. 그걸 알아챈 그라나트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헤일리를 끌어안고 이불을 추켜올렸다.

“이젠 괜찮아?”

“응… 괜찮은 거 같아…”

평균보다 조금 높은 그라나트의 체온이 몸을 감싸자 잠시 물러났던 수마가 밀려왔다. 적당한 온기와 안정이 되는 포근한 품, 옅은 체향에 겹겹이 둘러쌓인 헤일리는 저도 모르는 새 까무룩 잠들었다. 그라나트는 고른 숨을 내쉬며 단잠에 빠진 헤일리의 하얀 이마에 살포시 입술을 누르며 속삭였다.

“잘 자 헤일리.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