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마 탈랏사스Κύμα θάλασσας
최고관리자2023-09-17 22:25

풍어와 어부들의 안녕을 비는 해신제, 키마 탈랏사스는 이른 봄인 3월, 큰 보름달이 뜨는 날부터 7일간 열린다. 헤일리는 축제준비로 부산스러운 모래밭에 지팡이를 든 채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볕은 꽤 따사로우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겨울의 한기를 벗어던지지 않았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12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수초처럼 축축한 손으로 헤일리를 꽉 붙잡고 놓치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은 게 아니라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향의 풍경이 그를 유쾌하지 않은 추억 속으로 밀어넣었다.

아직 완전히 녹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얇은 얼음들, 흙투성이의 지저분한 묵은 눈, 응달에 꼿꼿이 서있는 서릿발, 이제 겨우 잎이 올라오는 산야의 초목은 봄이 늦는 북부의 3월 풍경이었다. 겨울은 바라지 않아도 빨리 찾아와서 늑장을 부리며 물러나는 게 북부다. 2월이 반쯤 지나가면 가을에 수확해둔 작물이 바닥이 드러나고 땅이 완전히 녹는 4월 중순까지는 곳간이 그득한 부자들이 아니고서야 모두가 배를 곯았다. 북부의 사람들에겐 겨울이 다가오는 게 가장 큰 공포였다. 개중에서도 젤루는 나라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마을이라 어린 헤일리는 품에 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로 훈기가 새어나오는 집을 찾아 온동네를 맨발로 돌아다녔다.

당시 헬렌은 달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 아이답게 병약하고 왜소하여 그 숨이 눈을 감은 새 끊어지기라도 할까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스승님을 만나게 된 건 정말 인생에 다시 없을 큰 행운이었다. 스승님 덕에 굶주린 채 얼어죽을 뻔하던 헬렌도 건강하게 자라났고 자신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잡고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면 감지덕지인 비루한 천애고아가 명문마법학교의 수석이라니! 밀려온 파도는 음울한 소리를 내며 얼어 부서졌다. 팔자 좀 고쳤다고 네가 잘난 귀족 나리라도 된 줄 아냐? 그래봤자 아비 얼굴도 모르는 천한 고아가 아니냐!

“우두커니 서있지만 말고 저리 좀 비켜 봐요! 에그, 허우대 멀쩡한 청년이 눈치가 없어서는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사나…”

“내버려 둬! 척 봐도 비실비실하게 생긴 게 책상 앞에 앉아있기 좋아하는 샌님이구만.”

“마법 좀 쓸 줄 안다고 저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아나… 으이그, 제사 지낼 때 부정 타면 안 되는데…”

들려오는 말만 조금 다를 뿐, 다 익숙한 어투였다. 부정한 부모를 둔 놈년들, 비루먹을 고아들, 고기밥으로나 써먹을 더러운 좀도둑들. 굶주린 남매에게 타버린 빵 한 조각도 나눠주지 않고 부지깽이로 내쫓던 어른들은 여전히 자기들 배를 채우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땐 서럽고 분했지만 이젠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영주가 거둬가는 작물의 양에 비해 베푸는 것은 한줌이었고 척박한 땅을 일구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옹졸해진단 것을 말이다.

“정말 너무도 변함이 없어서 웃음이 다 나겠네…”

드넓은 모래밭의 끝에서 끝까지 하염없이 걷다 멈춰선 곳은 남매의 은신처로 향하는 바위무더기 아래였다. 저기 위에, 왜소한 어린 아이 둘이 간신히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굴이 있다. 왜가리가 둥지로나 쓸 법한, 굴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고 좁은 터는 제대로 누울 수도 없었지만 새파란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남매가 돌팔매를 피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키가 큰 어른일수록 균형을 잡기 힘든 바위 위를 작은 발은 야무지게 편평한 곳을 찾아 딛으며 올라가곤 했다. 이젠 너무 커져서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는 그곳은 바닷바람을 막기 위한 널빤지가 입구를 막은 채 삭아가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은 채 아득히 먼 바다를 내다보고 있노라니,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것을 손에 쥔 노간주나무 지팡이가 가로막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감싸쥔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마력 운용이 서투른 어린 아이도 아니고 이미 제 몸과 같은 지팡이에 반발을 느끼다니.

“기가 차서 정말… 너, 뭐가 그리 불만인데? 한갖 도구 주제에 주인의 생각을 방해하다니 부러뜨려져야 가만 있을 거냐?”

그러자 이번에는 얼음 결정이 이마를 딱 소리나게 때리고 사라졌다. 헤일리는 이제 말조차 나오지 않는 지경에 이른 채 제 지팡이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노간주나무 지팡이는 길들이기 까다롭다며 다른 재료를 권하던 스승님은 이런 일을 알고서 그러셨을까.

“자작나무를 고를 걸 그랬어. 아니 지금이라도 새로 만들면…… 만들어서 뭐 해. 더이상 필요도 없는 걸.”

천한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십여 년을 함께 자란 형제에게조차 잠자리상대 취급을 당했다. 하룻밤의 유흥이 지나면 또 다른 상대를 찾아갈 녀석에게 정조를 강탈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서로 즐겨놓고 다 끝난 뒤에 혼자 심각해지면 녀석 또한 기분 더러울테지. 이제까지 누구와 입을 맞추고 배를 맞추든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당사자가 되고 나니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형제라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일 뿐. 아무리 과거를 지우려고 애써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단 걸 뼈저리게 깨우쳤다. 결국 아비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더러운 피는 노리개 노릇이 제일 잘 어울린단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왕국 제일의 마법사는 되지 못해도 묘소티스라는 성으로 불리며 떳떳하게 살고 싶었는데.

“됐어. 어쨌든 헬렌은 잘 자라주었으니까 나 같은 건 이제 없어질 때가 된 거야. 다른 형제들도 내가 있어봤자 걸리적거리기만 할 텐데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주제를 알아야지. 분수를 알아야지. 탐낼 것을 탐내는 염치가 있어야지. 불가능한 건 포기할 줄 알아야지.

북소리, 나팔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키마 탈랏사스, 해신 에우리비아께 드리는 풍어제가 시작되었다. 헤일리는 지팡이를 장식한 보석을 하나하나 뜯어 바다를 향해 내던졌다. 맑은 푸른빛의 아쿠아마린, 물결무늬의 라리마, 깨끗한 흰빛의 백옥, 투명한 유리 같은 수정, 시린 겨울하늘을 닮은 사파이어, 그리고 마지막.

“어리석게도 감히 당신의 권역에서 태어나 당신을 떠난 미천한 것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소서. 배신의 노여움은 가라앉히시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려니 너그러이 받아주소서.”

신원이 특정될 만한 것은 모두 버렸다. 달이 두세번 차고 기울고 나면 바닷물에 퉁퉁 분 사체는 고깃밥이나 되라고 깊이 가라앉혀질테다. 그러면 영영 누구도 자신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저에게도, 헬렌에게도, 스승님과 형제들에게도 최고의 결말이 될 것이다.

“헤일리!!”